서문, 나는 왜 편집광이 되었나
“Only the paranoid survice.” 내가 편집광적으로 대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제품이 불량이 나지 않을까 염려하고, 제품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로 시판되지 않을까 염려한다. …하지만 내가 ‘전략적 변곡점 Strategic Inflection Point’이라고 부르는 것에 비한다면 그런 걱정들은 어디까지나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략적 변곡점은 어떤 사업에서 근본적인 것들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고 이해하기 바란다. 그 변화는 새로운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최후를 알리는 전조일 수 있다. 전략적 변곡점은 기술 변화에서 기인할 수 있지만, 사실은 기술 변화 이상의 것이다. 사업이 이루어지는 방식의 전면적 변화가 바로 전략적 변곡점이다.
무엇인가 바뀌었다.
금융과 의료 산업뿐 아니라 미디어와 통신 사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침없는 투자, 인수, 시장 퇴출 등의 현상은 ‘무엇인가가 바뀌었다’고 시사하는 듯하다. 업계에서 중간 관리자 위치에 있다면, 회사 전체 또는 고위 경영자보다 먼저 상황 변화의 조짐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예전에 잘 작동하던 것이 더 이상 효과가 없다는 것, 즉 규칙이 바뀌었다는 것을 제일 먼저 인식한다.
변화의 바람에 스스로를 노출해야 한다. 우리 고객들, 기존 고객들뿐 아니라 과거에 집착하느라 놓쳐 버릴 수 있는 고객들에게 우리 스스로를 열어 두어야 한다. 우리에게 경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선 직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모든 곳에 존재하는 전략적 변곡점
월마트가 소도시로 진출하면 그 도시의 모든 소매점이 처한 환경이 변화하기 마련이다. 영화에 음향이 삽입되는 기술이 일상화되자 무성영화 시절의 모든 배우가 기술의 ‘10배’ 요인을 경험했다. 컨테이너 수송 방식이 해상 운송에 혁신을 일으키자 ‘10배’ 요인은 세계 주요 항구들 간 질서를 새로 정립했다.
경쟁자의 10배 변화
월마트에 맞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화가 한 방법이다. 오피스 디포 같은 카테고리 킬러들처럼 특정 시장 분야에 집중하는 전략은 규모의 불균형을 만회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스티브 잡스는 몇 년 동안 경쟁 상대라고 생각했던 제품(매킨토시)을 이기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만, 타임캡슐을 열고 세상에 나오자 경쟁 구도는 바뀌었고 경쟁 상대(윈도)는 새상보다 더 강력해졌다. 넥스트의 자금 사정이 계속 나빠지자 결국 잡스는 우아하지도 않고 쓰레기 같은 PC 산업을 자신이 처한 환경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PC 산업의 ‘10배’ 힘에 굴복하면서 넥스트는 소프트웨어 기억으로 다시 태어났다.
기술의 10배 변화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가 1927년 10월 6일에 개봉하자 ‘무엇인가가 변했다.’ 그전까지 무성이던 영화가 마침내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1931년이 되어서도 찰리 채플린은 유성영화로 전환하는 흐름을 거부했는데, 마침내 1940년 개봉한 영화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에서 대사를 구사해야 했다.
해운업에서 선박 설계의 표준화, 컨테이너 화물 운송 등이 해상 운송의 생산성에 ‘10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해운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시애틀은 서부 연안에서 컨테이너 화물선들이 오가는 가장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한때 해운의 중심지였던 뉴욕시는 계속해서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
고객의 10배 변화
1920년대의 자동차 시장은 느리게 변화했다. 헨리 포드가 모델 T를 출시하면서 외친 “이 차는 당신을 데려다주고 데려온다 It takes you there and brings you back”라는 슬로건은 기본 운송 수단으로서 자동차의 본래 매력을 전형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후 스타일과 레저가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관심사로 대두하자, GM의 엘프리드 슬론 Alfred Sloan은 “모든 주머니 사정과 목적에 맞는 자동차 a car for every purse and purpose”라는 관점으로 시장을 바라보았다. GM은 1920년대 말 이익과 시장점유율에서 앞서나갔고, 그 후 60년 이상 포드를 압도했다.
어떻게 우리는 변곡점을 뚫고 반도체 제국을 건설했나
일본은 1980년대 초부터 메모리 사업에서 우리를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인텔의 실적은 1980년대 중반에 갑자기 하락하기 시작했다. 고든 무어와 내가 결단을 내렸던 때는 1985년이었고, 1986년이 되어서야 메모리 사업 철수에 착수했다. 사업 전략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매우 힘든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메모리 반도체 회사가 아니었다. 회사의 새로운 정체성은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이었다. 인텔은 스스로를 “마이크로컴퓨터 회사”로 특화하기로 했다.
신호인가 잡음인가?
경영자 또는 관리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시장에서 승리하기 위해 직원들이 열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이러한 열정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쟁의 두려움, 파산의 두려움, 실패의 두려움, 패배의 두려움은 모두 강력한 동기 부여 요인이 될 수 있다.
두려움이 있기에 나는 이메일 읽기를 건너뛰지 않는다. 이메일을 읽음으로써 나는 심화하는 고객 불만, 신제품 개발 목표의 미달 가능성, 핵심 직원들의 불만 관련 소문 등과 같은 문제를 발견한다. 두려움이 있기에 나는 매일 저녁 경쟁사의 신제품 개발 기사를 빠짐없이 읽으며 그중 중대한 기사 내용을 다음 날 좀 더 깊이 파악하기 위해 스크랩한다.
혼돈을 지배하라
죽음의 계곡을 잘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과제는 그곳을 통과하고 난 다음 돌아보았을 때 회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멘탈 이미지’를 명확하게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인텔은 광범위한 반도체 회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메모리 회사 또는 마이크로프로세서 회사가 될 것인가? 넥스트는 컴퓨터 회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소프트웨어 회사가 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한 문장으로 대답해야 모든 사람이 기억할 수 있고 시간이 흘러도 당신이 의도하는 바를 기억할 수 있다.
1986년에 “인텔, 마이크로컴퓨터 회사”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을 때 이 말은 당시에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을 명확히 나타낸 것이었다. 이 문구에는 반도체도, 메모리도 언급되지 않았다.
경영학자들은 멘탈 이미지란 뜻으로 ‘비전’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내가 느끼기에 이 단어는 너무 고상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사의 본질과 사업의 초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정의하려면 ‘우리 회사가 가지 않은 방향’을 정의해야 한다.
인터넷, 위협인가 기회인가?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인터넷이 주는 기회가 위협을 능가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인텔이 이 모든 기회를 활용하는 데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새로운 환경에 좀 더 잘 적응하려면 우리의 ‘유전자 구성’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인텔은 전사 차원에서 3가지 전략 목적에 따라 설정된 방향을 준수하며 운영되고 있다. 이제 인터넷과 연결하는 노력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집결시킨다를 넷째 목적으로 추가한다. 이것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인터넷 관련 일을 원래의 3가지 목적 아래에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터넷 관련 활동을 별도로 다루고 원래의 3가지 목적 수준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인터넷의 중요성을 전사에 알리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래를 위해 스스로 준비하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텔의 마이크로칩에 기반한, 최고로 저렴한 인터넷 PC를 개발하는 데 인력을 배치해야 한다고 본다. 그 인력이 우리의 전략에서 ‘탈선’하게 내버려 두자. 그래서 그들을 우리 자신의 카산드라로 삼자. 과연 이 일이 가능한지, 내가 ‘잡음’이라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무언가가 변했다는 강력한 ‘신호’인지를, 그들이 가장 먼저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게끔 말이다.
옮긴이의 말
지금이야 인터넷이 우리의 생활과 산업의 지평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로브가 이 책을 쓰던 무렵에는 인터넷이 ‘전략적 변곡점’일지가 꽤나 아리송했던 모양이다. … 스스로 자료를 모으고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등 인터넷의 가능성을 면밀하게 분석해 그 결과를 구성원들 앞에서 직접 발표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보인 행동과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리더의 역할을 인지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리더는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이다.